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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

(한국전쟁)6.25 정전협정 70주년 낙동강 방어선 전투에 대해서 알아 보자!

by 쿠아왕 2023. 6. 24.

 

출처 : 대한민국 정책 브리핑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나 다 알고 있는 6.25 전쟁에 대해서 알아보려고 합니다.

내일이 바로 6.25전쟁 정전협정 70주년이 되는 날입니다. 6.25 전쟁은 북한의 불법 남침으로 인해 발생된 전쟁이고 북한은 소련으로부터 막대한량의 군수물자와 무기를 지원받아 남침을 했습니다. 시간은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 그날은 비가 많이 오는 날이었고 국군장병들은 대규모로 휴가를 나가 있는 상태였습니다. 각 전투지휘관(장군)들은 계룡대 육군본부에서 댄스파티에 참가하여 북한이 남침을 하는지도 모르고 있었습니다. 북한 입장에서 아주 시기가 적절한 상황에 남침을 한 것입니다. 이 부분에 있어서 많은 의혹들이 있으나 아직 밝혀진 것은 없습니다. 오늘은 북한의 남침으로 대한민국이 낙동강방어선까지 밀려서 낙동강 방어선에서 치열한 방어 전투를 했던 상황을 알아보겠습니다.

 

목차

     

    6.25 73주년

    유엔군과 대한민국 구군의 비교적 유리한 상황

    조선인민군의 공세로 인해 UN군과 대한민국 국군은 계속해서 후퇴하였습니다. 그러나 8월 초에는 더 이상 후퇴할 공간이 없을 정도로 밀려났습니다. 이에 따라 유엔군은 낙동강 방어선을 구축하여 최후의 방어선으로 삼았습니다. 이 방어선은 조선인민군의 포위 전략을 방지하기 위해 북쪽과 서쪽의 2면 만을 방어하였습니다. 이로써 조선인민군은 양측면을 노출시키지 않게 되었고, 포위와 섬멸 전략의 효과를 상쇄시킬 수 있었습니다. 또한, 유엔군은 부산항과 비행장을 통해 병력과 물자를 신속히 보급받을 수 있었습니다. 이로 인해 조선인민군은 전투 초기에 누렸던 병력과 무기의 우위를 점차 상실하게 되었습니다.

     

    6.25 73주년

    조선인민군의 8월과 9월 공세

    8월 5일, 조선인민군은 낙동강 방어선에서 이전의 전술을 다시 사용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그러나 유엔군과 대한민국 국군에 의해 효과적으로 저지되었고, 8월 공세는 시간을 끌게 되었습니다. 조선인민군은 이후 9월 공세를 준비하며 보급과 병사들의 사기 유지에 주력하였습니다. 9월 1일, 조선인민군은 낙동강 대공세를 감행하였습니다. 조선인민군은 5개의 공격축을 설정하고 목표로는 낙동강 방어선을 돌파하는 것이었습니다. 조선인민군은 경주, 대구, 가산 등에서 격전을 치렀고, 남강과 함안을 통해 마산을 점령하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유엔군과 대한민국 국군의 효과적인 방어로 조선인민군의 공세는 실패했습니다.

    6.25 73주년

    전투 결과

    조선인민군의 8월과 9월 공세의 실패로 인해 병력과 자원이 고갈되었으며, 공세 위주의 전략을 철회하게 되었습니다. 유엔군과 대한민국 국군은 조선인민군의 공세를 효과적으로 방어하였고, 전투는 유엔군과 대한민국 국군의 승리로 끝났습니다. 조선인민군은 공세의 실패로 인해 유엔군과 대한민국 국군의 반격을 막아내기 어려워졌으며, 전략적인 우위를 상실하였습니다.

    결론

    부산 교두보 전투는 유엔군과 대한민국 국군이 낙동강 방어선을 통해 조선인민군의 포위와 섬멸 전략을 방어한 전투였습니다. 조선인민군의 8월과 9월 공세는 실패로 돌아갔고, 유엔군과 대한민국 국군은 이를 효과적으로 방어하여 전투에서 승리하였습니다. 이러한 전투는 한국 전쟁에서 UN군과 대한민국 국군이 최후의 방어선에서 반격하여 전략적인 우위를 차지하는 중요한 전투 중 하나였습니다.